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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꼬꼬무 : 나를 찾아줘 - 1960 되살아온 아이 /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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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도 마산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 못봤어요?”
이 ***이라는 건 한 소년의 이름인데, 이 소년의 이름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한다.

1. 의문의 시체

1960년 4월, 마산 병원의 수술실. 수술이 잘못되면 그 곳에 있는 10명의 의사는 물론 그 주위에 있던 간호사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수술실에서는 무명실이 등장했는데, 집도의가 어딘가에 실을 묶고 실을 풀면서 건물 밖으로 나갔으며 그 안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실에 묶은 것은 다름 아닌 불발탄. 불발탄은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 주위에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불발탄은, 사람 몸에 박혀 있었다. 그것도 한 소년의 머리에. 김주열, 당시 17살의 아이는 얼굴에 불발탄이 박힌 채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2. 소년 김주열

김주열은 남원이 고향이다. 당시 마산상고라는 명문고에 들어가 은행에 취직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목표가 있는 소년이었다. 3.11일 시험을 보고 14일 함격자발표가 날 예정이었으니 발표가 미뤄지게 되면서 김주열은 이틀 더 마산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15일 김주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듣고 김주열의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러 마산으로 떠나게 된다. 경찰서에 아들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설명했지만, 경찰은 아들이 가출했다며 퉁명스럽게 대했고 계속 졸라대는 어머니를 쫓아내기까지 했다. 결국, 어머니는 주열이를 찾으러 혼자서 악착같이 찾아다녔다.

그 시간 부산일보 마산지부, 허종 기자도 김주열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신문에 실종기사를 내고 정보원들도 풀어놓았다. 심지어 카메라도 숨기면서 말이다. 정치적으로 공기가 험할 때 마음껏 취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시절, 카메라를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카메라로 포착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김주열의 행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김주열이 행방불명된지 15일 째, 어머니는 김주열을 여전히 찾고 있었고, 이 소문이 퍼지고 퍼져 마산에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그러던 어느날, 김주열의 시신이 연못에 버려졌다는 제보를 받고 연못에 달려갔고, 6시간 동안 물을 퍼내고 수색을 했지만 주열이는 없었다.

3. 소년, 행방을 찾다. 하지만...

실종 27일째,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서 결국 남원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허 기자의 정보원이 말한다. “지금 바로 중앙부두로 가보세요”
허 기자는 전속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미 부둣가에는 몇명이 모여 있었고, 달려가서 물속을 본 순간, 그는 알았다. 그가 김주열이라는 것을. 그리고 재빨리 카메라를 들어 주열이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보통 익사한 시체가 누워있거나 엎드려있기 마련인데 주열이의 시신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특히 눈 부분이 괴기할 정도로 이상했다.

주열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마산병원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수간호사는 그것이 프로펠러가 오른쪽 눈에서 목까지 관통이 된 상태였다고 이야기했다. 그 프로펠러의 정체는 ‘불발탄’. 폭탄 전문가도 와서 보았지만 그 폭탄을 뽑아봐야 알겠다고. 그래서 무명실을 묶어 불발탄을 뽑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불발탄은 뽑혔고, 그 폭탄은 직경 3cm, 길이는 20cm로 크기가 꽤 큰 폭탄, 미제 최루탄이었다. 바리게이트나 벽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쏘는 것. 기본적으로 최루탄은 위험하기 때문에 군중을 향해서 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즉슨, 누군가가 김주열에게 대놓고 최루탄을 쐈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그 누군가는 ‘경찰’ 이었다.

3. 왜, 소년은 최루탄을 맞았는가

최루탄을 쏜 범인은 박 경위였다. 당시 합격자 발표가 미뤄진 이유는 3.15선거 때문이었는데 당시 이승만은 헌법을 바꿔가며 12년동안 대통령에 집권할 때었다. 당시 부통령은 이기붕, 인기도 없지만 무능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전 선거에 참패를 당했다. 그래서 대통령은 여당, 부통령은 야당이어서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 선거는 부통령도 여당 쪽에 당선이 되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였던 것이다. 당시 투표 때 누가 누굴 찍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도 짜서 배치되기도 했고,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표를 강요하기도 했다. 게다가 투표에 야당참관인도 있었는데 참관인도 2-3군데 밖에 배치되지 않게 했고 40%의 사전투표를 넣어서 투표함에 넣기도 했다.

선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전투표한 4할의 투표용지가 발견되었고 야당 측에서는 선거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시위를 일으켰고 특히 학생들이 많이 참가했다. 당시 민주주의에 대해 학교에서 교육이 잘되어있던 학생들이 정의감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한편 경찰서에서는 선거에 지장이 생기면 목이 날아가게 생겼기 때문에 시위를 진압해야했다. 서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하고 있던 상황, 소방차가 전봇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고 깜깜해진 틈을 타 차가 시위대를 향해 헤드라이트를 켰고, 앞이 보이지 않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총을 쐈다. 그게 다름 아닌 최루탄. 주열형제도 손을 잡았지만, 한 순간 손을 놓쳐버렸고, 그게 김주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경찰은 학생들의 시위에 실탄을 쏘며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학생들을 끝까지 찾아가 총을 쐈다. 심지어 총에 맞은 학생에게도 구둣발로 밟으며 폭력을 가했다. 눈에 띄는 학생은 경찰서에도 잡아가기도 했다. 그 때 경찰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체를 발견했는데, 그 시신이 김주열 이었다. 박 경위의 보고를 들은 상관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령을 하게된다. 박 경위는 그 시체를 마산 앞바다에 유기했고 27일 후 시체는 떠올랐다. 차가운 바다 안에서 부패도 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 시위 중 9명의 사망자가 있었고, 그 중 6명이 10대 소년들이었고, 전부 다 관통상으로 숨졌다.

4. 4.19혁명, 시작되다.

시위는 이 사건으로 인해 들불처럼 일었다. 시민들은 경찰서에 난입하기 시작했고, 경찰서장의 차도 불태웠다. 이승만은 이 시위를 공산당이 지휘한 시위다 라고 했고, 부통령인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장난감을 준 것이 아니다” 라고까지 했다. 심지어 경찰은 남원에 있는 어머니가 김주열의 시신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막고 있기도 했다. 시신이 되어 돌아온 주열이의 시신을 건네며 빨리 장례를 치르라고 협박을 하기도. 한편 허 기자가 찍은 사진이 신문을 통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통해 4.19혁명이 시작했고, 결국 이승만은 하야을 선언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가게 되는 것으로 이 사건이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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